- 시베리아-바이칼여행 - 하바롭스크 가는 열차

17. 하바롭스크 가는 열차

하바롭스크 가는 열차

다시 2박 3일의 일정이 시작된다. 올 때는 설레임에 자다 쉬다 구경하다 왔는데, 갈 때는 사실 걱정도 된다. 59시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 동안을 무엇을 하며 지낼 것인가. 먹을 걱정도 있다. 이미 거의 모든 음식에 질려 버린 상태이니 어떨지.

어제 중앙시장에서 먹을 크래커 두 봉지(한봉지에 거의 1kg정도로 대단히 큰 봉지다)와 초코스프레드, 소시지 약간, 도시락면 몇 개와 봉지라면 (도시락 면 먹고 난 그 곽을 버리지 않고 쓰면 되긴 하는데...) 즉석식 러시아 수프 10포, 보드카와 약간의 안주거리를 사 두긴 했지만, 사실 내가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건 없다. 가다가 열차역의 노점상에서나 사 먹어야 될 것인데 뭐가 있을지...



 

열차 시간이 아침 8시라 조금 일찍 나왔다. 1번 트램을 타고 열차역에 도착하니 7시 20분. 잠시 역 구내도 구경하고 플랫폼으로 나가서 열차도 구경하고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얼마 안 있어 열차가 도착했는데, 우리 객차가 없다. 차장에게 표를 보여 주니 저쪽이라는데 가 보니 열차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가만히 있어 보니 객차 한 대가 이 열차의 끝으로 와서 붙는다. 우리 객차만 이르쿠츠크-블라지보스톡이라고 씌여져 있고 다른 객차들은 노보시비르스크-블라지보스톡이라고 쓰인 걸로 봐서 이르쿠츠크에서 사람이 넘쳐 객차를 증설하여 운영하는 것 같았다. 대략 1주일 전 역에 가서 표를 사려던 한국 손님들이 표가 없다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엔 6인실. 문이 있는 방이 아니니 실 이라는 표현은 쓸 수 없지만. 다행히 우리 셋은 복도쪽이 아닌 창가쪽에 자리를 배정받았다. 이르쿠츠크에서는 6인실에 우리 셋 밖에 없었지만 곧 다음 정차역에서 사람들이 타서 꽉 찼다. 네자리 중 하나 남은 자리는 처음엔 부리야트 계통의 아가씨가ㅣ와서 줄창 자다가 울란우데에 내리더니 다음으로는 좌석표 한 장으로 탄 아줌마와 아들이 타서 한참 동안을 가다가 새벽에 내리고 다음으로 블라지보스톡으로 가시는 할머니가 타셨다. 다른 사람이 옆에 와도 조금도 말이 안통하니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으니 답답하다.

중간에 탄 꼬마아이는 처음엔 우리를 많이 경계하더니 조금 시간이 지나자 얼굴이 풀어지고 해안이랑 잘 논다. 아이들끼리는 말이 안통해도 잘 놀수 있는데 어른들은 그게 잘 안되니 어른이 되면서 점점 순수한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겠지. 나 같아도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기는 하지만 쉽게 마음을 열지는 못하는 성격이 있다. 사실 살아가는 데엔 약간의 푼수끼가 있는 것이 훨씬 부드러운데 천성적으로 그게 안 되는 건 나도 어쩌지 못하는 성격이다.

복도쪽에 자리를 배정받은 두 아저씨는 한 분은 우리 처 외삼촌을 닯고 한 분은 이나라의 푸틴 대통령을 닮았다. 이 두 분은 종 내 카드놀이를 하시다가, 자분자분 이야기를 하시다가, 식사도 같이 하고 아주 다정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여행을 하셨다. 우린 이 두분을 우리끼리 외삼촌과 대통령이라고 불렀는데 외삼촌은 어린아이를 대단히 좋아하는 듯 옆 칸의 6살짜리 귀여운 꼬마 밀라나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지 참 많은 이야기를 하신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엄마와 함께 여행 중인 밀라나도 아저씨가 좋은지 자주자주 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5살짜리답지 않게 말도 또박또박 하고 우리가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상당히 조리있게 말하는 품이다. 우리가 열차에 탄 드문 외국인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처음엔 구경을 와서도 약간 경계를 한다. 그럴 때 쓰이는 방법이 아무래도 물량 공세 아니겠는가. 해안이가 초코렛도 쥐어 주고, 과자도 쥐어 주고 하니 금새 경계심을 푼다.

첫날이 지나니 밀라나는 해안이와 붙어서 그림도 그리고 색칠도 하면서 까르르 웃기도 하고영락없는 어린 꼬마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저씨와 이야기할 땐 대단히 어른스럽더니 놀 때는 영락없는 꼬마인 것이, 아무래도 가정교육을 잘 받은 어린이다.

몇 칸 건너 있는 두 청년은 거의 출발할 때부터 카드를 시작해서 우리가 내릴 즈음까지 카드를 하는데 참으로 대단하다. 하루가 지나고 나니 아예 우리 자리에 걸터 앉아서 외삼촌,대통령과 같이 카드 삼매경이다. 뭐, 그들 때문에 발을 뻗지 못하게 되었지만 무례하다는 생각보다는 그런 풍경이 이곳 사람들 풍경이려니 하고 넘겼다. 나도 처음엔 불편하게 다리를 놓으며 몸에 안닿으려고 했지만, 조금 지나니 그냥 편하게 다리를 뻗고 닿든 말든 하면서 갔다. 다리를 뻗으니 알아서 약간 피해 앉는다. 오히려 서로에게 약간의 불편을 끼치는 데 대해 그다지 신경을 안 쓰는 맘 편한 사람들이어서 나도 자연스럽게 행동하니 오히려 편했다.

우리 자리가 흡연실 (열차와 열차간의 공간) 옆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는데 그 중 한 아저씨는 다닐 때마다 문을 쾅하고 세게 닫아서 우리는 처음에 쾅쾅맨이라고 별명을 붙였다. 횡단열차의 문은 살살 닫으면 다시 열리기 때문에 그렇게 닫는 것이 습관이 되신 아저씨인데, 젊은 아이들은 오히려 문을 살살 닫는다. 아무래도 옆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나이든 아저씨들은 그런 것이 몸에 아직 배지 않은 듯. 처음에 경아씨가 그 아저씨 문 닫을 때 빤히 쳐다봤단다. 이후로 아저씨도 뭔가 느낌이 왔는지 나하고 눈이 마주칠 때 빤히 쳐다보던데 아무래도 쾅쾅맨이라고 하는 것이 느낌이 왔나 보다. 해안이가 앞으로 그렇게 부르지 말고 ㅋ 아저씨라고 부르자고 해서 동의. ㅋ아저씨들은 한 3-4명 되었는데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다. 참 차장 아줌마도 ㅋ아줌마다.

이 분은 다음 날 흡연실에서 내가 먼저 눈인사를 건네자 같이 웃으며 화답해 주었고, 그 다음부터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먼저 찡긋 눈인사를 하셨다. 대부분의 사람이 2박3일 동안 같이 가는 열차인 만큼, 처음에 서먹하던 사람들도 하루가 지나니 별 스스럼 없이 대한다. 말은 안 통해도 계속 얼굴을 마주치는 경험이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듯. 말이 통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흡연실은 거의 이야기방이다. 많으면 한 6명이 폭 1m정도의 좁은 칸에 들어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나도 골초지만 가끔씩은 들어가서 눈이 따가와서 고생을 많이 했다. 흡연실 쪽은 아무래도 창문을 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다. ㅋ 아저씨도 골초인 듯 자주 들락거리신다.

아침 10시쯤 되면 사람들이 세수를 하러 오느라 우리 자리 부근이 붐빈다. 이 시간은 화장실 가는 것도 자제해야 하는데 화장실이 세면대와 같이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아침 식사까리를 주섬주섬 챙기는 시간이기도 하다.

점심은 오후 4-5시에 먹으며 저녁식사는 오후 9-10시다. 이유인 즉슨, 10시정도까지 해가 떨어지지 않기 때문인데 해가 긴 백야현상에 따라 사람들의생활패턴도 바뀌나 보다. 하긴, 알혼섬에서도 아침식사는 10시, 저녁식사는 오후8시였었다.

올 때는 4인실 쿠페라서 잘 몰랐는데 개방된 6인실이라 사람들의 먹는 모습이 잘 보인다. 이곳 사람들의 여행 식단의 중요한 부분이 도시락면이다. 야쿠르트의 도시락면이 맞는 것 같은데 상표는 코야다. 먹는 방법은 우리와 달라서 일단 뚜껑을 열고 안의 면을 4조각으로 부수고 각 조각을 양손으로 쥐고 완전히 부수어 놓고 물을 넉넉히 붓는다. 한참을 기다린 뒤에 불어서 스프처럼 된 것을 숟가락으로 먹는데, 필요한 경우 거기에 장조림 같은 것도 넣어서 먹는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 식이 아니라 러시아식 라면 먹기다. 라면의 면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 유럽인이니만큼 스프를 많이 먹는 사람들이니 라면도 스프처럼 만들어 먹지 싶다. 우리 객차 안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점심이나 저녁으로 도시락면을 먹는 것을 보니 도시락면의 인기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물론 이곳 도시락면은 우리나라 것보다 덜 짜고 덜 맵다. 그리고 쇠고기맛, 닭고기맛, 야채맛, 버섯맛 등 다영한 맛이 준비되어 있으며, 도시락면과 함께 각 도시마다 쫙 깔린 농심 사발면을 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으니 야쿠르트가 한국에서는 마이너 메이커이지만 이곳 러시아에서만은 메이저 메이커가 아닌가 싶다.





갈 때는 주로 풍경을 보았지만 올 때는 주로 구름들을 본다. 바이칼을 넘어서 울란우데를 지나니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매우 장엄한 구름떼가 지나가는데 태초의 시절에도 그랬으리라.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장엄한 구름떼들이다. 저 멀리 보이는 낮게 깔린 구름띠중 몇몇은 땅 아래로 가지를 드리운 것이 흡사 토네이도가 아닐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까지 들며 높은 산지가 아닌지라 하늘의 영역이 엄청나게 넓어 층층이 쌓인 구름떼는 천지창조의 한 장면이 펼쳐질 것만 같다.

태초의 사람들은 그런 구름을 보고 외경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가끔씩 우리 나라 정도에서 보는 멋진 구름을 장관이라 말한다면 이곳은 천상의 아름다움을보여 주는 구름떼들이다.

둘째 날 저녁쯤. 갑자기 낮게 깔린 구름들로 온 천지가 노을빛 노란생으로 변하면서 비가 떨어진다. 저 멀리 구름을 벗어난 하늘을 파랗기만 한데 ㅇ곳은 황천 그 자체다. 급작스럽게 내린 비는 열차 창문에 금을 가게 만드는데 갑자기 경아씨가 나지막이 소리친다.

"야, 쌍무지개다!"

난생 처음 보는 쌍무지개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열차가 부드럽게 옆으로 돌아 화각을 벗어난다. 급히 화장실칸으로 가서 문을 열고 찍으려 하니 이번엔 길 가에 늘어선 자작나무가 시야를 막는다. 몇 번을 시도한 끝에 찍긴 했지만 무지개가 점점 옅어지고 있어 아쉬운 장면이 찍혔다. 사진기를 껐는데 이번엔 앞쪽 무지개의 끝자락이 선명하게 타이가 숲의 앞으로 드리워 지는 장면이 나온다. 시급히 카메라를 켜는데 또다시 자작나무 숲의 방해가... 방금 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저런 장면을 본다면 누구든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상상을 하게 될 것이다. 하늘(텡그리=단군)을 섬기는 우리 고대 신앙이라든가 샤먼이나 지도자들이 가슴에 드리웠던 태양을 상징하는 청동거울인 것그리고 무지개를 타고 올라가는 여러 전설들이 바로 이런 자연환경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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